뮤지컬 잭더리퍼는 O.S.T 듣고 나서 무척 보고 싶었던 극이다. 특히 유준상 배우가 읊조리듯 부르던 “이 도시가 싫어”란 넘버가 귀에 감기더니 계속 마음에 남았다. 너무 좋아하는데, 상처 받아서 싫다고 말하고 그래서 정말 싫어져 버린 그 느낌이....그 곡을 들을 당시 꼭 내 마음 같았다.
<목차>
폭주하는 기관차
상실감에서 비롯된 비겁한 욕망.
왜 미제사건일까? 왜 매춘부일까?
폭주하는 기관차
이 곡을 들었을 무렵에 내가 가진 열정들이, 능력들이 “돈”으로 환산되지 못한다면 이 사회에서는 정말 가치가 없는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고민보다는 그것 때문에 좀 우울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마주한 현실이 딱 그랬다. 아마도 현실을 마주한 장소가 방송국이라서 그랬을지도... 방송 산업이 자본주의의 첨병이라고도 하지. 그럼, 내가 마주한 현실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까?(난 종사자도 아닌 관찰자일 뿐인데...) 내가 이 사회를 가치 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와서 “돈(소득, 수입)”으로 증명해야 하는 것인가? 왜 내 신념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인지...내가 살고 있는 사회, 내 삶과 일을 정말 사랑하는데....정말 싫다.(물론 그 무렵에 그런 고민을 하긴 했지만 난 여전히 내 삶을 그렇게 증명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관심은 계속 갖는 걸로....^^) 왜 이런 고민에 우울했을까?
현대사회에서는 돈이 많을 수록 누릴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것도 늘어난다. "가져야 한다"와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촉발한다. 심지어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까지. 그것은 마치 허기와 같아 욕망은 점점 노골화되고, 그 욕망이란 것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도 사라진다. “폭주하는 기관차” 그 자체다. 철도 산업은 산업 혁명의 중추였기에, 폭주하는 기관차야 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적확한 상징일 것이다. 인간을 위해 만든 기관차이건만, 폭주하는 기관차 앞에서 인간은 심하게 다치거나 심지어 죽는다. “폭주하는 기관차”와 그 밑에 깔려버린 사람들의 군상.....7월 18일 8시 서울 디큐브 아트센터 공연을 보고 나섰을 때의 느낌....내가 마치 그 기차에 깔린 냥 많이 무거웠다. 극은 무서웠으며 우울했고, 이성적이면서 사회비판적이었다. 김법래 배우가 잭 역이었기 때문이 그 느낌이 더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음산하고 무거운 목소리........(극을 볼수록, 극에 녹아들면 들수록 분석질이 하고 싶어서, 잘난 척하고 싶어서 근질근질.....이 몹쓸 직업병아.)
상실감에서 비롯된 비겁한 욕망.
막 위에 1888년(각주1) 당시 런던 지도와 그 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표시하면서 뮤지컬 잭더리퍼는 시작된다. 지도는 온통 붉은 핏빛으로 변하고 잠시 후에 수사관 앤더슨(이건명 분)이 무엇엔가 쫓기듯 취조실로 뛰어 들어온다. 코카인을 흡입한 후에 사건 보고서를 쓰다가 그 사건 보고서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사건 보고서는 휴지통에서 재가 되고, 앤더슨은 다시 취조실을 나선다. 그리고 무대는 2일전 살인 사건 현장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앤더슨은 살인마 잭을 고발하는 다니엘(지창욱 분)을 만나게 된다. 앤더슨이 다니엘을 취조하면서 다시 시간과 장소는 다니엘과 잭, 글로리아가 만나게 되는 7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7년 전 글로리아(쏘냐 분)의 소개로 다니엘은 연구용 시신을 구하기 위해 잭(김법래 분)을 만나지만, 잭은 시신을 살인을 통해 구해주는 살인자였다. 글로리아의 신로고 잭은 경찰의 추격을 받다가 실종된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글로리아와 사랑에 빠지게 된 다니엘은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가려고 하였으나 미국으로 떠나기로 한 날 밤 일어난 화재로 글로리아를 잃고 만다. 다니엘은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7년 후에야 영국에 와서 글로리아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화상과 매독이란 병으로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매독”이란 병명도 당시 사회의 특징이다. 공창이 사창이 되면서 매춘부들이 관리-보호받지 못하게 되면서 만연된 병이라고 한다.)
글로리아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다시 만난 글로리아를 또 잃지 않겠다는 다니엘의 욕망을 부추겼고, 그녀를 살려내겠다는 다니엘의 욕망은 결국 죽은 줄 알았던 잭을 불러냈다. 이때부터 글로리아에게 이식할 장기를 구하기 위한 잭의 살인은 계속되었다. 잭의 살인은 폭주하는 기관차였고, 다니엘의 사랑은 잃는 것이 두려운 비겁한 남자의 욕망으로 변하여 그 기관차의 동력이 되었다. 글로리아가 이 일을 알게 되자 다니엘은 잭을 멈추기 위해 앤더슨에게 자수를 하고 잭을 잡기 위한 함정수사를 제안한다. 이때 잭을 끌어들이기 위해 내세운 이는 앤더슨의 옛 연인인 매춘부 폴리(서지영 분).
앤더슨이 폴리에게 부탁하러 가서 부르는 넘버 “이 도시가 싫어”, 이어지는 폴리의 넘버 “아주 오래된 이야기”. 그제서야 앤더슨이란 수사관이 왜 코카인을 하는 수사관이 되었는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간다. 폴리가 매춘부가 되어 가는 동안에, 그렇게 폴리를 잃는 동안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 비겁함이 싫었을 것이다. 수사관이 되어서는 그런 자신과 닮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고. 자신과 그들이 사는 사회가 싫었을 것이다. 약에 취하지 않고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없었겠지.(건더슨 건더슨 ㅜ.ㅜ) 앤더슨 등 뒤에서 내내 그 마음 감추지도 드러내지도 못하면서 주저하는 폴리는 또 얼마나 안쓰럽던지...서폴리의 디테일한 연기가 눈물을 불렀다.ㅠ.ㅠ
폴리가 살해된 다음에야 비로소 다니엘은 잭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다니엘과 잭의 넘버 “내가 바로 잭”. 이 극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이고 클라이맥스이다. 모든 배역과 배우들간의 호흡이 중요하겠지만, 내가 다니엘과 잭의 호흡이 다른 어떤 배우들 간의 호흡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까닭은, 이 장면 때문이다. 둘은 다른 듯 같아야 한다. 잭이 비가 오는 날 새벽 4시에 다니엘을 찾아오면서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잭은 가장 약해지는 시간에, 다니엘이 불러 낸 그 자신일 수도 있고, 그를 찾아 온 악마일 수도 있다. 잭은 다니엘의 욕망이 빚어낸 상(相)이다. 나약하면 나약할수록 비겁하면 비겁할수록 그 욕망의 실체는 잔인하고 무섭다. 인간의 욕망이 지닌 속성은 때론 미친 사람의 형상일 수도 있고, 폭력적인 사람의 형상일 수도 있고, 얼음보다 차가운 사람의 형상일 수도 있다.
욕망이 불러낸 실체를 광기를 좇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 극 전체에 관통하는 해석이다. 신성우 잭과 조순창 잭이 이 해석이고, 상대역 다니엘들은 여기에 세팅되어 있는 것 같다. 폭력은 2012년, 외면(냉담)은 2013년 김법래 배우의 해석이다. 욕망을 광기로보는 것조차도 어쩌면 광기 속에 피하려는 비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여지는 폭력이나 외면 쪽에 더 있을 것 같다.
외면이나 냉담은 앤더슨의 행동-은폐, 염세-들과도 호응이 된다. 법잭은 지다니엘의 잭보다는 건더슨의 잭에 더 가까워 보였다. 앤더슨이 폴리에게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하는 말에나, 폴리를 함정 수사에 끌어 들인 거에는 앤더슨이 매춘부 폴리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이 내재되어 있다. 결국 그 편견은 폴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현대사회에서는 외면, 편견, 차가운 시선이 더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총칼보다는 이 편이 더 잔인하고 무섭다. 이 극에 나오는 남자들 다 모두 이기적이고 냉담한 사람으로 보여서, 어찌보면 안쓰러운 사람들인데도, 난 다 무서웠다.
그런데 관객 입장에서는 이 해석이 보면서 생각을 해야 하니 좀 어렵다. 게다가 현재 다니엘들은 광기에 맞춰져 있다. 다니엘들과 이 부분에 대해 대화나 교감을 나누고 있는지.... 지창욱 다니엘한테는 가능성이 보였는데, 남은 회차가 거의 없다는 게 아쉽다.(*) 다니엘들이 여기에도 맞춰지게 되면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 싶다.
사건의 전모를 알아버린 앤더슨. 그러나 폴리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다면서 사건 현장을 인멸한다. 그리고 돌아온 취조실. 1막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간다. 1막 시작하면서 그가 불렀던 “가려진 진실”은 “불편한 진실”이었고, 이제는 그가 은폐하고자하는 진실, 외면하고자 하는 진실이 되었다. 결국 그는 사건 보고서마저도 재로 만들어 버렸다. 폴리를 잃은 상실감에서 비롯된 강한 욕망 때문에 앤더슨은 그날 새벽에 취조실 문을 나서면서 잭과의 동행을 택했을 것이다.
왜 미제사건일까? 왜 매춘부일까?
-여기서부터는 잘난 척
뮤지컬 잭더리퍼는 1888년 8월에서 11월 사이 영국 런던 화이트 채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 사건들을 모티브로 하였다. 이때 발생한 살인 사건은 연쇄살인사건으로 알려졌는데, 범인을 체포하지 못해 그를 “살인마 잭(Jack the Ripper)”라고 불렀다. 그런데 내가 이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지하게 된 것은 <역사속의 매춘부>>(니키 로버츠 저, 김지혜 역, 책세상, 2004)를 통해서였다. 이 책에서 1981년 영국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피터 서트클리프 Peter Sutcliffe)를 “언론이 살인마 잭의 영웅적인 후예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니키 로버츠는 1981년 당시이 연쇄살인사건 피의자를 100년 전의 연쇄살인사건 피의자 잭과 연결시켜 그를 잭의 영웅적인 후예로 만든 것은 언론이라고 지적하였다. 아울러 영국 법무장관 마이클 헤이버즈 경이 "일부는 매춘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가장 비극적인 측면은 일부여성이 매춘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라고 한 발표가 결국 “법의 관점에서 매춘 여성에 대한 살인은 수용할 수 있는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연쇄살인 사건을 정부가 방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경찰의 수사와 정부의 발표는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세상에 전해졌다. 그 살인 사건 보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 와중에도 살인은 계속되었다. 아니 저자의 주장처럼 정부와 언론과 대중은 연쇄살인을 조장하고 있었고 어떤 의미에는 공범이었다. 살인의 대상이 된 데에다가 그 이야기의 대상이 된 사람이 매춘부였기 때문에, 아무도 죄의식을 갖지 않았다. 어찌보면 살인을 부르는 편견이고, 외면이고, 냉담이다.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것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예외는 있다. 자본주의가 시민혁명과 함께 역사에 발을 들여 놓았기 때문에 사람만큼은 사고 팔지 않는 원칙을 세웠다.(장기 매매 금지, 공창 금지도 같은 선상이다.) 사람에 대해 매매를 한정하는 것으로 자본주의는 권력을 획득했다. 사람을 사고 팔 수 있었던 시절에는 사람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죽일 수도 있었고 그게 곧 권력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사고 팔 수 없는 시절에는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 대신에 재판을 통해, 병원의 치료를 통해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있고 죽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돈이다. 돈을 주고 죽지 않게 하는 게 권력이 되었다. 돈과 권력이 별개이던 이전과 달리 돈이 권력을 쟁취하였다.(각주3)
그런데, 이 범주 안에서 매춘부들은 자신을 팔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그냥 상품으로 간주된다. 이들이 사람이고자 한다면 이 원칙을 어기는 것이기에 사회 악이고, 이 범주 밖에 머물러야 하기에 이방인이다. 어느 편이나 법도 사람들도 이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욕망을 정당화시키는 편견. 그 편견 속에서 그녀들은 사회의 악을 청소하겠다는 살인자에게 살해당하고,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정부로부터 외면당하고, 선정적인 소재일 뿐이라며 언론에 의해 이야기 당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대중들에게 소비된다.
1981년의 연쇄살인범은 체포되었지만, 1888년의 연쇄 살인범은 체포되지 않았다. 현대와 같은 과학 수사가 없어서? 위의 맥락에서 보면 100년 전의 살인 사건과 피의자는 정부의 조사와 발표, 언론의 보도를 통해, 대중의 소비를 통해, 연쇄살인사건과 연쇄살인범으로 둔갑하였고, 희생자는 선정적인 이야기 소재로 전락해 버렸다. 편견은 죄의식을 앗아갔다. 아무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 이상 모두가 공범이다. 그러니 사건은 앤더슨의 마지막 대사처럼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각주4)
불교에서 욕(欲)으로 만들어진 상(相)을 깨라고 한다(破相). 그러나 이건 어렵기에 욕을 다스리기 위해서 우선 혜(慧)를 길러야 한댄다.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내 가치 기준과 욕망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면서 살아야겠다. 가지고 싶었는데 갖지 못한 상실감에서 온 비겁한 욕망을 품고 사는 것은 아닌지? 갖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편견과 외면, 냉담한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적어도 공범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새벽에 잭의 방문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난 새벽 4시에도 깨어 있을 수 있을까? 사회가, 사람들이, "돈"으로 나를 재단하려고 할 때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고 우울해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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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잭더리퍼의 시대 배경은 1888년,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였다. 그 무렵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반강제 반자발의 이른바 "개화"를 겪고 있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 6.25 동란을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였는데, 자본주의 사회가 되는 계기인 근대화의 시기를 둘러싼 논쟁은 첨예하다. 일제강점기라는 설과 1960년대~70년대라는 설이 있다. 자본주의 맹아 단계를 설정하여 이미 조선 영, 정조 시대부터 자본주의화 될 조짐이 보였다 하여 그 시기를 좀 더 끌어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면에 있는 사회 병리 현상과 자본주의 병폐를 생각한다면, 시기 논쟁보다는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한국사회의 병폐에 대한 논쟁의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각주2) 지창욱 배우가 다니엘 역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성남에서 디큐브로 올 때까지 난 샤롯데와 충무아트홀 회전문을 가열차게 돌았다. ㅋㅋ) 뮤지컬 “그날들”에서 안정된 연기와 무대에 대한 열정을 보여 줬기 때문에, 노래가 가끔 아쉽긴 하지만 이제는 믿고 볼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당일 공연에서 집중력 높은 좋은 무대를 보여줬다. 보컬 트레이닝 좀 더 받는다면, 그리고 그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는다면, 5년 후에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주3) 잭더리퍼 1막 중 다니엘이 죽어가는 사람을 응급처치로 구한 다음 그 사람을 살리려면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보호자에게 돈을 주는 장면이 있다. 이는 다니엘과 글로리아가 살고 있는 사회가 돈으로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동시에 돈 때문에 죽게 내버려 질 수도 있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막 중 앤더슨의 독백 중에 “근처 공장에서 내뿜는 재” 또한 앤더슨이 살고 있는 사회가 돈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사회임을 보여 준다.
(각주4) 이 극에서는 먼로가 다니엘을 가리키면서 말한 "내가 만들었다"는 대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 "살인마 잭”을 소재로 한 쇼를 초반에 보여주는데, 이것은 살인 사건을 돈벌이 유희용으로 즐기고 있음을 비꼬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뮤지컬이 또 그런 맥락이니 이건 셀프디스다.ㅋㅋ
(사족) 구성, 캐릭터, 음악, 무대 다 좋은 작품인데, 흥행이 안 되고 있다. 팬들이 지적하는 문제점들 제작사에서 귀담아 듣고...배우들로 무마하려 하지 말고.....제발.....이 총체적인 난국을 해결해 줬으면....예매하면서도, 보러가서도 안 쓰러운 좌석 상황... 내가 "삼짹덕"인줄 알았는데, "짹덕"은 아니고 "삼덕"만인 듯.
*공연일시 : 2013년 7월 18일 목요일 8시
*공연장소 : 신도림 디큐브 아트센타 (앞자리였는데, 전후좌우 사방이 모두 지창욱씨 팬들이어서 소외감은 들었지만 재밌었다)
*주요출연진 : 잭(김법래 분), 다니엘(지창욱 분), 앤더슨(이건명 분), 폴리(서지영 분), 글로리아(쏘냐 분), 먼로(강성진 분) 등
뮤지컬 잭더리퍼에 관한 정보는 홈페이지 ( http://www.jacktheripper.co.kr/ ) 참조.
2013년 8월 2일 작성, 8월 5일 1차 수정. 8월 6일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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